흑백의 언어, 예술가 안나 박

한국에서 태어나 유타에서 자란 예술가 안나 박(Anna Park)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깊이 매료되었고, 그 열정은 곧 그녀의 정체성이 되었다. 주로 흑백의 목탄과 잉크로 그리는 그녀의 대형 작품(길이 3미터가 넘는 경우도 많다)은 사실성과 추상의 경계를 오간다. 미국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빌려 외부자의 시선으로 그 세계를 비틀어낸다. 작품 속 여성들은 강인함과 불안함, 자신감과 욕망, 유머와 불편함을 동시에 품고 있다.

어린 시절 그녀는 한국, 뉴질랜드, 캘리포니아를 거쳐 유타 주 샌디(Sandy)에 정착했지만, 주변의 시선 속에서 늘 외부인으로서의 이질감을 느껴야 했다. 그림은 그녀에게 유일한 피난처였다. 미술 교사 브루스 로버트슨(Bruce Robertson)의 지도로 고전적인 목탄 기법을 익혔고, 열네 살 때의 뉴욕 여행은 훗날 그녀의 예술적 여정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뉴욕 시로 거주지를 옮겨 명문 디자인스쿨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와 뉴욕 아카데미 오브 아트(New York Academy of Art)에서 공부했다. 동시에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2019년, 예술가 KAWS가 그녀의 학생 전시 작품을 즉석에서 구입하고 SNS에 소개하면서 그녀의 경력은 급속히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뉴욕, 도쿄, 로스앤젤레스, 서배너(Savannah. 미국 조지아 주에 있는 작은 예술의 도시)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며 비평가와 큐레이터들의 찬사를 받았다.

최근 작품들에서 그녀는 단순한 종이 드로잉의 한계를 넘어선다. 단열재와 한지를 겹쳐 입체적인 표면을 구성함으로써 드로잉과 회화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것이다. 색을 배제한 흑백의 세계는 그녀에게 오히려 가장 진실한 표현의 언어다.

브루클린의 스튜디오에서 정오부터 자정까지 작업에 몰두하는 그녀는 무척이나 규칙적이다. 동시에 자유스럽고 유머러스한 예술가다. 예리한 시선과 장난기 어린 감각을 동시에 지녔다.

스물여덟 살의 안나 박은 흑백 드로잉으로 세계 미술계의 중심에 서있다. 그녀에게 흑과 백은 한정된 선택이 아니라, 세상과 자신을 가장 또렷이 드러내는 완전한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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